3) 게임이론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은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대부분 어떤 고정된 패턴을 따른다. 가령 대학생 아들/딸이 얼마나 아빠와 빈번히 같은 문제로 부딪히고 갈등이 비슷하게 전개된다. 어떤 친구는 오랜만에 만나도 어제 만난 것처럼 친밀하고 유쾌하지만, 어떤 친구는 안 보면 보고 싶지만 보면 꼭 싸우게 되는데 싸움의 시작이나 치고받는 패턴이 지겨울 만큼 똑같다. 번의 게임이론은 이런 일을 잘 설명해 준다.
(1) 우리 안의 아이, 부모, 어른
이 이론에서는 인간의 성격구조를 아동, 부모, 성인의 세가지 자아상태로 파악한다. 아동자아는 천진난만하고 재미를 추구하는 부분이고, 부모자아는 옳고 그름을 판단, 충고, 비판하며 성인자아는 성숙하고 현실적이다. 이 세 자아상태는 우리의 표정, 말과 행동에서 나타난다. '야, 신난다', '재미있겠다' 하며 무엇에 흥분하고 관심을 빼앗길 때 우리는 '아이'이다. 뾰로통해지거나 칭얼대거나 떼쓸 때도 그렇다. '부모'가 될 때 우리는 남들을 보살펴 주거나, 근엄한 표정으로 타이르고, 따지고, 훈계하고, 금지한다. '성인'은 분석, 판단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려 한다. 누구나 이 세 측면을 다 가지고 있으나, 셋 중 어느 한 측면이 더 두드러지는 것이 보통이다. 독자들은 모두 주위에서 어린애 같은 사람, 남을 항상 가르치거나 보살피려 하는 사람, 과학자나 컴퓨터 같은 사람을 한 명씩을 댈 수 있을 것이다.
늘 어른자아로 살아야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 어른자아의 유능하고 조직적이고 현실적인 면이 언제나 긍정적인 것도 아니다. 매슬로는 자기실현자 연구에서 자기실현자들이 어린애 같은 특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자연스럽고 단순하며 일상의 것들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늘 경외심과 기쁨을 가지고 즐길 수 있었다. 아동자아는 유치한 어리광쟁이일 수도 있지만 사랑스럽고 독창적일 수도 있고, 부모자아도 설교하고 훈계하는 지겨운 존재일 수도 있지만 따뜻하게 보살피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 자아상태가 상황, 과제, 대상에 적합하냐 하는 것이다. 직장인들은 거의 언제나 어른자아로서 기능하고 상호작용하겠지만, 기발한 아이디어, 창의성은 아동자아의 표현이고, 힘든 동료를 배려하고 위로하는 것은 부모자아이다.
관계 맺기에도 적합성이 중요하다. 장난치고 싶을 때 친구/ 연인도 같이 아이가 된다면 즐겁겠지만, 부모 '탈'을 쓰고 핀잔을 준다면 무안할 것이다. 반면 울고 있을 때 친구/ 연인이 부모처럼 나를 안아주고 달래주면 행복을 느낄 것이다. 우리 안에서 자아상태가 서로 관게를 맺기도 한다. 상처받아 울고 있는 자신에게 스스로 엄마가 되어 따뜻하게 달래기도 하고 반대로 야단치고 구박도 하며, 어른으로서 "운다고 뭐가 해결 돼?" 하면서 사태를 냉정하게 분석해보자고 나올 수도 있다.
(2) 상호작용 분석
게임이론에서는 두 사람이 관계를 맺고 있을 때 나타나는 자아상태를 분석함으로써 대인관계를 설명한다. 함께 방을 쓰는 학생 중 한쪽(A)이 청소를 매번 자기가 한다고 불평하는 경우를 보자.
A : "청소 좀 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냐? 너무 한다. 정말." (부모)
B : "에이 참, 하면 되잖아?"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린다) (아동)
A : "토요일은 네가 청소하기로 한 날이야, 잊지 않았지?" (성인)
B : "그래, 알았어." (성인)
A : (시무룩한 얼굴로 종일 말을 안 한다) (아동)
B : "너 무슨 화나는 일 있니?" (성인)
A : (늦게 돌아 온 친구에게) "미팅 재미있었어?" (성인)
B : "야, 그렇게 재미난 미팅은 처음이었어." (아동)
위에서 가장 바람직한 상호작용은 네 번째의 대화이다. A는 겉으로는 성인자아로서 질문하지만, 사실은 "네가 어질러 놓은 것을 내가 치우는 동안 너는 신나게 놀러다니는 구나"하며 비난한다(부모자아). B의 반응에 A는 더 화가 치밀 것이다. 이렇게 말과 속마음이 다르면 상호작용이 끊어지기 쉽다. 흔한 예로, 집에 늦게 들어갔을 때 어머니가 문을 열어 주시면서 "지금 몇시니?" 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성인자아로서 정보요청이 아니라, "좀 일찍 다녀라" 는 훈계(부모자아)이다. 그럴 때 "12시40분이에요" 라고 시간을 가르쳐 드릴 것인가? 고개 숙이고 얼른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이럴 때 가장 바람직한 반응은 숨겨진 메세지에 반응하는 것이다. 바로 위에서 "내일부터는 안 늦도록 할게요" 라든지, 위에서 B의 경우 "자꾸 내 순서를 잊어버려서 화났지? 미안해" 라고 한다면 이상적이다. 어머니가 "늦게까지 안 들어오면 걱정이 되잖아" 라고 하시고, A가 "알면 됐어, 이제 내가 두 번 내리 청소하면 돼" 하고 나오면 상호작용은 계속 흘러갈 수가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렇게 솔직한 대화는 흔하지가 않다. 어머니는 "너는 말뿐이야, 그저께도 1시가 넘어 들어왔지 않느냐?" 하고 꾸중하고, A는 "너 무슨 말 하니? 누가 화났대?" 라고 대꾸하기가 더 쉽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말을 안 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고 대화는 끊어진다.
(3) 게임
이 이론의 흥미 있는 공헌은 '게임'이라는 상호작용 구조의 발견이다. 두 사람 이상의 상호작용이 어떤 고정된 틀을 따라 진행되면서 분노와 적개심 같은 나쁜 감정들을 가져올 때 그들은 게임을 하는 것이다. 번은 여러 가지 게임 유형을 발견하였다. 자신감 없는 여자가 지배욕 강한 남자와 결혼하고는 '당신만 아니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불평할 때, 두 사람은 게임을 하며 사랑없는 결혼생활을 유지해 간다. 다음의 '~게 하면 어때? 응, 그런데 ...' 게임은 한 집단 내의 상호작용에서 나온 것이다.
B : 남편한테 해달라지 그래요.
A : 좋은 생각이지만, 그이는 이번 주말에 일해야 해요.
C : 스스로 하지 그래요.
A : 그래도 되지만 연장이 없어요.
D : 연장을 마련하지 그래요.
A : 예, 그러나 이번 달엔 돈을 너무 많이 썼는걸요.
외현적 수준에서 A는 문제에 대한 도움을 청하고 남들은 조언을 한다(모두 성인자아). 그러나 내현적 심리적 수준에서 A는 "너희들이 나를 돕는다고? 히히..." 하는 반응(아동자아)으로 남들을 좌절시키면서 승리감을 느낀다.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피해자, 가해자, 구원자의 역할을 하면서 진실한 감정을 내놓고 친밀해지는 것을 피한다. 진정한 감정이나 욕구를 숨기고 분노나 적개심을 감추며, 피해자, 가해자, 구원자의 가면을 동시에 혹은 번갈아 쓰면서 관계는 이어가는 것이다. 어느 한쪽에서라도 가면 쓰기를 거부하고 '판을 깨뜨리'면 관계가 파괴될 수도 있지만, 친밀성을 복구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게임만 하는 병적인 관계는 떠나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관계의 복구도 가능하다. 관계를 위해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면 이런 결단을 하기도, 병적 관계를 떠나기도 쉬울 것이다.
교환이론과 역할이론에서는 대인관계를 합리적, 이성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인상을 받는데, 게임이론은 대인관계에는 이성의 힘으로 이해하거나 다스릴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우리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감정, 생각과 행동에는 이해가 안 되고 고치고 싶어도 못 고치는 부분이 많이 있다. 관계 맺기 패턴과 성격 특성들은 상당 부분 어릴 때의 관계경험에 의해 결정되지만, 특별히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았다면 많은 성격 및 관계 특성들은 전문가의 도움 없이도 고칠 수 있다. 이 점에서 논의한 이론들이 그러한 노력들에 지침이 되어줄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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